“미안하지만 이번엔 힘들 것 같아.”
짧은 문장을 꺼낸 그 이후, 상대의 반응은 늘 한 박자 느렸다. 말은 없었지만 공기는 달라졌다. 관계 속의 ‘침묵’은 거절보다 더 버겁게 느껴졌다. 나는 그 침묵을 어떻게 견뎠고, 어떻게 나 자신을 지켜냈을까. 불편함과 공존한 기록을 남겨본다.
침묵은 ‘벌’처럼 느껴졌다
거절을 하고 나면 찾아오는 특유의 정적. 그건 단순한 ‘말 없음’이 아니라, 무언의 눈치와 기류였다. 말로 표현되진 않았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상대의 짧은 “아, 그래…” 한마디. 말은 허락했지만, 감정은 거기 머무르지 않았다. 대화가 줄고, 톤이 미묘하게 달라졌고, 연락 텀이 길어졌다. 마치 내가 무언가를 망가뜨렸다는 느낌. 거절이 그 사람에겐 작은 배신처럼 받아들여졌다는 걸 눈치챘을 때, 나는 무력해졌다.
그때 나는 자책했다. ‘조금만 더 참고 들어줬으면 어땠을까’, ‘역시 거절하면 관계가 틀어지네.’ 이렇게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침묵을 내가 감당해야 할 결과처럼 받아들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느꼈다. 침묵은 상대의 감정이지, 나의 잘못은 아니라는 것. 거절은 선택이고, 그 뒤의 침묵은 서로의 감정을 정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는 걸. 내가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 자체는 결코 잘못이 아니었다.
‘불편함’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기로 했다
침묵은 처음엔 두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회피하지 않고 그 감정을 곱씹어보면, 오히려 거기서 단단함이 생겼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몇 가지를 배웠다. 첫째, 거절한 뒤 바로 다정하고 자연스럽게 돌아가길 바라는 건 욕심이라는 것. 감정은 흐르는 시간 속에서 정리되는 것이지, 즉각적인 수용이나 용납을 요구하는 건 무리였다.
둘째, 침묵은 항상 부정적인 신호는 아니라는 것. 어떤 친구는 내 거절 이후 서운함을 표현하지 않았지만, 며칠 뒤 아무렇지 않게 다시 연락을 해왔다. 침묵은 ‘거절에 상처받았으니 네가 잘못했어’라는 의미라기보다,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라는 무언의 언어였던 것이다.
셋째, 내 감정을 끝까지 지켜주는 게 관계에서의 진짜 성숙이라는 것. 불편함이 생긴다고 해서 곧바로 다시 예스로 돌아가는 건 내가 나를 버리는 일이었다. 그 불편함 속에서도 내 입장을 반복해서 부드럽게 전달하는 법을 배웠고, 그것은 결국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제 불편함을 피하지 않는다. 대신 그 안에서 나 자신을 지켜내는 힘을 키워가고 있다.
관계를 유지하는 진짜 힘은 ‘일관성’이었다
예스와 노를 오락가락 반복하면, 오히려 사람들은 더 불편해했다. 내가 거절해도, 다음엔 또 무조건 들어주면 결국 신뢰는 깨졌다. 그래서 나는 배웠다. 거절 이후의 침묵을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관계를 제대로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한 친구는 나의 거절 이후 처음엔 섭섭해했지만, 내가 일관되게 나의 경계를 지켜가는 모습을 보고 조금씩 태도를 바꿨다. 그 친구는 결국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네가 변한 줄 알았는데, 지금은 더 건강해진 거 같아.”
그 말을 듣고 알았다. 관계는 충돌이 없는 게 아니라, 진짜 나를 보여줄 용기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침묵은 잠시의 간극일 뿐, 그걸 견딘 뒤엔 더 단단한 연결이 생겼다.
예전의 나는 침묵이 무서워 거절을 피했지만, 이제는 안다. 침묵은 감정이 지나가는 통로일 뿐,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걸. 그래서 오늘도 나는, 어색한 기류 속에서도 나의 진심을 지켜낸다.
거절 뒤의 침묵은 불편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그걸 견딜 수 있을 때, 진짜 내 감정과 타인의 감정을 함께 바라보게 된다. 이제 나는 침묵에 휘둘리지 않고, 그 속에서도 나 자신을 잃지 않는 방법을 배워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