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요”는 때때로 관계를 망치는 말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거절보다는 침묵을, 감정보다는 수긍을 택해왔다. 하지만 어느 날, 더는 참기 어려운 순간에 처음으로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라고 말했고, 그 순간부터 관계에 변화가 찾아왔다.
‘좋은 사람’이라는 무게를 내려놓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무의식적으로 ‘거절하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부탁을 받으면 망설임 없이 수락했고, 싫은 상황도 참고 넘겼다. ‘예스’는 타인을 배려하는 태도라고 믿었지만, 돌아보면 그건 스스로를 소진시키는 방식이었다. 상대는 계속 요구했고, 나는 점점 지쳐갔다.
그러다 한 친구의 부탁을 끝내 거절하지 못한 채 억지로 도와주고 돌아오던 날, 나는 무기력감에 눌렸다. 그날 밤, 내가 왜 그렇게까지 자신을 희생했는지 되물었다. 그 질문이 전환점이었다.
이후 작은 것부터 연습했다. “오늘은 어렵겠어”, “그건 내가 잘 못해” 같은 말들을 내 입에서 꺼내는 데는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상대는 의외로 담담했다. 오히려 내 상황을 이해해주고, 불편해하지 않았다. 그때 깨달았다. ‘예스’만이 좋은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고, 거절에도 충분히 따뜻한 배려가 담길 수 있다는 것.
명확한 거절이 애매한 침묵보다 낫다
“생각해볼게” “일단 받아두자”라는 말로 모호하게 넘긴 적이 많았다. 하지만 그 애매함이 때로는 더 큰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될 수도 있겠지’라고 기대한 상대는 나중에 실망했고, 나는 또다시 미안해졌다. 사실 가장 불편한 것은 둘 다 감정을 숨기고, 피로감만 쌓여가는 관계였다.
그러다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이번 주말에 같이 봉사활동 가자’는 제안을 받았다. 평소였다면 흐릿하게 응했겠지만, 그날은 단호하게 “이번 주말엔 혼자 쉬고 싶어서 이번에는 어렵겠어”라고 말했다. 이후 지인은 “괜찮아, 다음에 같이 가자!”라며 가볍게 넘겼고,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훅 내쉬었다.
그때부터 알게 됐다. 관계를 해치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단호한 거절이 아니라, 말하지 못한 내 감정과 침묵의 무게라는 것을. 명확한 표현이 오히려 서로를 더 편안하게 해준다는 단순한 진실.
거절 후에 찾아온 거리감은 오히려 건강했다
“아니요”를 자주 말하다 보면, 자연스레 멀어지는 사람도 있다. 과거의 나라면 그게 두려워서라도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거절을 했을 때 거리를 두는 사람은, 결국 나의 ‘예스’에만 반응하던 관계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친한 지인 한 명은 내가 몇 차례 ‘이번엔 힘들다’고 했더니 연락을 끊었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그 관계가 내가 맞춰줘야 유지되던 것임을 인정하게 되면서 마음이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그 대신, 내가 거절을 해도 여전히 나를 존중해주는 친구들과의 관계는 더욱 단단해졌다.
‘거절’을 통해 관계의 진위를 확인할 수 있다는 건 큰 수확이었다. 상대방이 불편해할까 조심스럽던 나의 말들이, 오히려 신뢰를 주는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결국 “아니요”는 사람을 밀어내는 말이 아니라, 진짜 함께할 사람을 가려내는 자연스러운 필터였다.
처음엔 두려웠지만, “아니요”를 말하는 연습은 나 자신을 존중하는 첫걸음이었다. 이 단어는 관계를 끊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짜 관계를 지키기 위한 보호막이었다. 오늘도 나는 작은 거절 하나로, 스스로를 지키고 있다.